상단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본문 하위메뉴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간송 전형필,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

와세다 대학 재학시절 1928년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 문화 유산을 수준 높은 안목으로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연구하여 이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을 스승으로 만나
그림 및 고서에 남다른 취미를 보였고,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종로 일대의 상권과
전국 각지의 대토지를 물려받아 조선 최고의 경제력을 갖춘 젊은 간송은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이때 간송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이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서화가이자
금석학자인 위창오세창(1864~1953)이다.
우리나라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집필하였던 위창의 문하에서 간송은
민족의 혼인 우리 문화재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안목을 키워나갔다.
간송은 일제가 수탈해 가는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것에 온 힘을 기울였다.
간송은 1932년 인사동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본격적으로 고서와
골동을 수집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낼 수 있었다.
10만석 가산을 모두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으면서도 수집한 간송의 소장품에는 회화, 도자, 금속공예,
불교조각, 전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포함되어 있고, 지금까지 우리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수집한 문화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 인재양성의 절실함을 깨달은 간송은 1940년 폐교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인
보성학교를 인수하여 후학양성에 힘썼다. 해방 이후 고적보존위원회와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여 동인지 『고고미술(考古美術)』을 창간하였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종로4가 112번지 본가에서 향년 57세에 급성신우염으로 급서한 간송.
한평생 개인의 안위보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을 통해
지금 우리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간송 전형필 연보

한평생 개인의 안위보다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을 통해
지금 우리는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수 있다.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1. 1906. 7. 29.

    서울시 종로구에서 중추원 의관 전영기와 밀양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정선

  2. 1921. 3.

    어의동 공립보통학교 졸업

  3. 1926. 3.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4. 1930. 3.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 졸업
    귀국 후 위창 오세창 선생의 조언을 받으며 문화재 수집 시작

  5. 1932.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 후원 운영

  6. 1934.

    성북동에 북단장 개설
    위창 · 춘곡 · 월탄 · 청전 · 심산 등 당대 일류 서화가 및 문사들과 교우

  7. 1938.

    북단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葆華閣) 개설

  8. 1940. 6.

    재단법인 동성학원 설립. 이사장 취임

  9. 1945. 9.

    보성중학교장 겸임

  10. 1946. 9.

    보성중학교장 사직

  11. 1947.

    고적보존위원회 위원으로 선임

  12. 1954.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 제2분과 위원으로 선임

  13. 1956.

    교육공로자 표창 수상

  14. 1960. 1.

    고고미술동인회(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회) 발기

  15. 1962. 1. 26

    서거

  16. 1962. 8.

    문화포장 추서

  17. 1964. 11.

    국민훈장 동백장 추서

  18. 2014. 10.

    금관문화훈장 추서